노동의 감성학: 다층적 스펙트럼의 노동
안진국 (미술비평)

노동’은 애증의 대상이다. 노동 이론을 정초한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1932)에서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다.”“Only through labor does man distinguish himself from animals.”라고 단언한 후, 몇 페이지 뒤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을 제거한다.”“die kommunistische Revolution … die Arbeit beseitigt”[독일어 원문]라고 적었다. 그에게 노동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속해야 할 활동이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혁명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지속과 제거. 모순을 자아내는 애증적인 무엇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입장, 즉 자신의 중심사상에 대한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애매모호하고 이중적이었다.”“Marx’s attitude toward labor, and that is toward the very center of his thought, has never ceased to be equivocal.”라고 지적했다(『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노동을 깊이 파고든 마르크스조차도 노동에 대해 이처럼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만큼 ‘노동’을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다.
방성욱의 작업은 처음부터 노동이었다(<Green Collar Workers>(2017)). 그는 “어린 시절 경험에 기반한 노동 감각의 실체”를 추적하며, 제도적·담론적 ‘노동’이 가리는 지점을 예술로 가시화한다. 작가는 제도권이 말하는 노동, 담론으로 논의되는 노동이 지닌 추상성과 폭력성을 감지했으며, 이 때문에 그와는 결이 다른, 자신이 경험한 노동성을 작업으로 드러낸다. 제도적·담론적 노동은 구호나 외침처럼 강력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작가에게 노동은 “습도, 온도, 촉각, 먹먹함 등의 감각”으로 기억되는 것이며, “막막함, 불안함, 지루함 등의 감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작가노트Artist’s statement).

노동의 정의(definition), 노동의 정의(justice)
정의로운 노동은 가능한가? 이 질문을 꺼내려면 먼저 ‘노동의 정의(justice)’가 무엇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보통 이 지점에서 ‘노동기본권’이니 ‘근로기준법’, ‘노동조합’, ‘최저임금법’ 같은 용어가 튀어나온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Labour is not a commodity.”라고 밝힌 국제노동기구(ILO)의 필라델피아 선언(1944)이 소환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노동은 점점 거대 담론이 된다. 이렇게 변할 때 점차 생동력을 잃는 건 ‘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이다. 즉 ‘노동의 정의(definition)’는 ‘노동의 정의(justice)’에 의해 화석화된다.
방성욱은 노동을 “계약 관계를 통해 발생한 대가의 행위를 기반”으로 성립되며, 이것은 “역사 속 시대의 철학, 인문학자 그리고 자본 등에 의해 정의되었다”라고 말한다. 동시에 노동이 “다수가 공감하고 공유된 정서 안에서” 규정된다고 지적하면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노동은] 다수의 규칙(권력) 같은 것인데 이것이 올바른 노동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작가노트Artist’s statement). 즉  ‘전문성과 다수성이라는 권력이 정의한 노동이 정의로운 노동을 보증하는가?’ 이 질문에는 회의적 시선이 담겨 있다. 이는 작가가 몸으로 겪어 온 노동의 행위와 담론의 장에서 말해지는 노동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한다. 그는 노동이라는 개념이 권력화되어 노동의 가치를 위계화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을 구체화한 결과가 바로 <10인의 정의>(2025)다.
이 작업은 9명의 필자(최금숙, 현혜연, 이준희, 최인이, 한석경, 홍모씨, 김유빈, 이연숙(리타), 윤단희)에게 ‘노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각자가 생각하는 노동에 관한 생각을 모은 작업이다. (애초에 10인을 상정했기에 제목은 그대로 유지했다.) 법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노동자, 예술가 등으로 구성된 글의 필자는, 전문가와 일반인, 노동 담론에 근접한 사람과 그 논의의 테이블에서 소외된 사람,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 등이 교차하면서 다층적 스펙트럼을 이룬다. 전통적 노동 개념이 더 이상 동시대의 다양한 노동 형태를 포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필자가 노동을 대하는 태도, 개인 서사, 비판의 각도와 세기는 제각각이다. 그런 만큼 글의 ‘온도’는 상이하다. 개인의 위치와 경험에 따라 노동이 전혀 다른 의미로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방성욱은 이 작업을 통해 “대가의 크기, 제도의 진입 장벽 혹은 다수와 소수에 따라 신분, 계급을 정하고 사회적 가치 안에서 우위를 나눴던 불합리한 암묵적 합의”를 성찰하고, “자본주의하에 상품으로서 노동을 벗어나 인간의 가치 창출을 위한 창조적 노동”을 고민하길 요청한다(작가노트Artist’s statement).
작업은 무향실(<노동감각>)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제시된다. 여기서 9명의 노동에 관한 발화는 노동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관람객은 원한다면 무향실에서 <10인의 정의>를 목소리 높여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작업을 그곳에서 읽도록 권한다.) 이때 우리는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끼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음파,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사라지는 소리에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감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의 정의(definition/justice)에 대한 은유처럼 읽힌다.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에서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노동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불안, 노동의 감각화
무향실은 벽의 반향을 제거해 소리의 반사를 차단하도록 설계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1951년 하버드대학의 무향실을 경험한 존 케이지John Cage는 이전에 의식하지 못했던 신체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심장 박동뿐 아니라 신경계가 내는 소리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까지 낯선 소리를 들었다. (이 경험이 이후 <4분 33초>라는 놀라운 작업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보통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반사음으로 공간의 크기를 가늠하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런데 무향실에서는 이러한 지각적 단서가 사라지면서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낯선 신체음은 긴장과 불안을 유발한다. 방성욱은 <노동감각>(2025)을 통해 의도적으로 고립과 불안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신이 노동 현장에서 느꼈던 ‘긴장, 불안, 각성’의 감각을 관람객과 공유하길 원한다. 이 감각이 작가가 느낀 노동의 감각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노동의 감각은 사건의 순간이 아니라, 뒤늦게 찾아오는 각성이다. 식은땀과 함께 엄습하는 긴장과 불안이며, 그것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노동감각>은 유년의 기억과 예술 작업 현장에서 축적된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종종 위험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내 행동은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감각된다”라고 말했다(작가노트Artist’s statement). 그리고 “어머니가 느꼈던 불안의 감각을 일종의 유전처럼 전달받았다는 느낌”이라고도 이야기한다(작업소개 영상). 어머니가 짜깁기 바늘을 공업용 수동 그라인더로 가는 그 불안한 장면, 유년 시절의 이 한 장면을 작가는 “전기장판 위 한 뼘 범위 안에 엉켜있는 얼굴, 손, 바늘, 그라인더, 불꽃, 쇳가루와 전쟁을 치르는” 노동 현장의 풍경으로 기억한다. 중요한 것은 당시에는 이 행위를 어머니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위험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위험의 인식은 회고적이었다. 이러한 지연된 자각은 <노동의 놀이화: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Turning Labor into Play: This is Very Important to Me>(2023)에서도 반복된다. 이 작품은 도미노를 대량으로 쌓는 작업으로, 이 작업을 설치하던 도중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그 위험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그 사실을 깨닫고 불면이 올 만큼 불안감이 몰려왔다. 어머니의 노동 현장과 작가의 예술 현장은 모두 급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현장이었고, 그 급박함이 위험과 위기를 느끼는 신경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방성욱은 이것이 “나만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주변에 흡사한 현상들이 의식을 잡는다”라고 말하며(작가노트Artist’s statement), 노동에 대한 개인적 불안이 보편적 정동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동일한 노동이라도 맥락에 따라 감각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과거 불안을 유발했던 짜깁기를 어머니에게 다시 부탁해 그 결과물을 작품화했다(<더 나은 삶을 위하여>). 어머니는 작업 과정에서, 즉 짜깁기하는 동안 이 행위를 “매우 흥미로워하시고 재미있어하셨다.” 이를 보며 작가는 “어머니가 예전에 했던 노동이 (…) [이제] 어머니에게 놀이의 과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말한다(작업소개 영상). 이는 노동과 놀이, 불안과 즐거움이라는 경계가 상황에 따라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의 정의가 단일한 틀로 고정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노동-놀이-예술의 연속체
어머니의 짜깁기 작업인 <더 나은 삶을 위하여>(2025)는 어머니의 노동 기억을 재소환하고 그것을 다른 의미의 시간 속에 위치시킨다. 바늘을 갈고 천을 메우는 반복 행위는 수행적 시간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노동의 의미를 묻는다. 더불어 노동이 예술이 되는 상황에서 노동과 예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모호성을 탐색한다.
방성욱이 노동의 의미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경험이나 20대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느꼈던 노동의 이질감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에 대한 고민은 그의 예술 실천 자체에서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는 예술 작업이 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급여를 주지 않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인가. 일의 당위성을 확립하고 집중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로 정의할 때, 왜 그것이 노동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임금 노동만을 정당한 노동으로 승인하는 상품화된 노동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노동의 본질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해 극단적인 반복과 집중을 요구하는 9만 개의 도미노 조각을 쌓는 작업을 보여줬고(<노동의 놀이화: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Turning Labor into Play: This is Very Important to Me>), 이를 통하여 도미노 쌓기라는 놀이가 규모와 시간이 극단적일 될 때 노동이 될 수 있으며, 예술로 제시되면 창작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즉 같은 행위가 놀이가 될 수도, 노동이 될 수도 있고, 그 결과가 그저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생산이 될 수도, 창조적인 예술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또한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과거에 느꼈던 불안의 감각을 소환함과 동시에, 노동과 놀이, 예술의 상사성을 드러낸다. 그의 작업에서 노동은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 놀이, 창작, 예술과 연속체를 이루며, 유동적으로 변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지점은 노동의 은폐성에 대한 은유다. 짜깁기는 옷의 구멍을 메워 완전함을 회복시키지만, 그 자체는 드러나지 않아야 성공적이다. 즉 노동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도 마찬가지다. 표면은 매끄러워 짜깁기의 행위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뒷면에는 촘촘한 바느질의 흔적이 가득하다. 이는 많은 노동이 결과물의 표면 아래 숨겨져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이 완벽할수록 노동의 흔적이 사라지는 역설이 이 작업에 스며 있다.

끝나지 않는 물음
어떤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방성욱이 반복해 던지는 ‘노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렇다. 작가가 체험에서 느낀 ‘노동의 정의할 수 없음’은 과연 그만의 생각일까. 작가는 이것이 보편적 감각인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무향실을 만들었고, 그 안에 9인의 목소리를 모았고, 어머니와 함께 짜깁기를 수행했다.
담론의 언어는 노동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노동이 지닌 감정과 감각을 지워 버린다. 방성욱이 제안하는 것은 노동을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언어가 아닌 신체로,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담론이 아닌 경험으로. 그에게 노동은 형태가 아니라, 감각이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