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마음
이연숙(리타)
나무 도미노 조각이 약 100,000개 이상 사용된 방성욱 작가의 <노동의 놀이화: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를 말하자면 우선 이 작품(art), 아니 작업(work)의 성격을 무어라 규정할 수 있을지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러 설치 인력과 함께 긴 시간 동안 작가가 현장에서 쌓아 올린 10m 가량의 도미노는 같은 스케일로 제작된 기록 사진(작가의 전공이 원래 사진이다)과 나란히 병렬되어 있다. <노동결과보고>라는 제목의 이 사진으로 된 벽을 따라 쭉 걷다 보면 그것의 뒷편에 설치된 실물 도미노와 마주칠 수 있게 된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주는 강한 빛의 대비 효과는 사진과 도미노로 된 두 개의 벽을 더욱 웅장해보이게 만든다. 작업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작업 사이를 통과해 걸어야만 하는 이런 경로는 작가가 관객의 보는 ‘일’까지를 작업에 포함하기 위해 일부러 계획한 것이다. 혹은 가이드 라인도 없이 설치된 도미노 주위를 걷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도미노를 건드려 보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목적이거나. 작업이 고정된 의미를 생산하는 대신 전시장이라는 맥락 속에서 일종의 ‘어그로’로 기능한다는 점, 다시 말해 현장에서 관객들에게 (좋든 나쁘든) 특정한 반응과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방성욱 작가의 작업은 분명 (서구) 미술사에서의 제도 비판에 기반한 개념 미술의 전통과 연결된다. 작업의 제목만 해도 그렇다. 설치된 도미노를 마치 빌딩인양 수직성과 규칙성을 강조하여 찍은 일련의 사진은 <노동결과보고>라는 어찌보면 냉소적이고 어찌보면 유머러스한 그런 제목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요구한 용역 또는 납품의 결과라는 것이다(그런데 이것이 예술 작품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에게 이런 노동을 요구한 것인가?).
마찬가지로 도미노를 쌓아 올린 작업이자 노동의 결과인 <노동의 놀이화: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는 제목에서부터 즉시 여러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러한 의문은 작년 8월 부천아트벙커 전시를 위해 준비된 소그룹 워크숍에서부터 (작가와 ‘비평가’로서 ‘매칭’된 나를 포함해) 이미 많은 참여자들이 제기했던 것이다. 요컨대 방성욱 작가의 작업에서 노동, 놀이, 예술은 각각 어떻게 정의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말을 일부 재구성한 결과이기도 한) 전시 리플렛의 작가 소개문에서도 다소간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 같다. “그러나 방성욱 작가는 본인의 예술적 작업이 노동이라고 말하며 (...) 그러면서 동시에 놀이라고 선언한다. 언뜻 모순적인 이 언명에 방성욱은 무섭도록 진지하다.” 말하자면 설치 인력들과 전시장에서 밤을 새 가며 도미노를 쌓은 것이 예술인 동시에 노동이며 노동인 동시에 놀이라는 것인데,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자본주의하에 상품으로서 노동을 벗어나 인간의 가치 창출을 위한 창조적 노동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까지만 들었을 때는 마치 마르쿠제와 같은 사상가가 비억압/비폭력적인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다형적 에로스에 대한 충동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방성욱 역시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진 생산 중심의 노동으로부터 “사회적 가치에서 벗어나고 생산성이 없는” 유희로서의 노동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된다. 아마도 제목의 “노동의 놀이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일테고 말이다.
이처럼 상품으로서의 노동으로부터 무쓸모한 놀이(유희)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구제하고자 한 예술가들은 기존에도 이미 존재해왔는데, (서구) 미술사에서는 1960년대말 등장한 ‘미술노동자연합(Art Workers' Coalition, AWC)’이 대표적인 예시로 꼽힌다. (비록 그의 아내이자 신체 예술가였던 아니 멘디에타의 죽음과 관련한 많은 의혹이 있지만) 칼 안드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노동자 정체성을 드러낸 혹은 이용한 작가다. 방성욱과 마찬가지로 육체 노동자 ‘출신’이지만 동시에는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미니멀리즘 예술의 기수로서 그는 자신의 예술 행위를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육체적, 정신적 특수성과 연결지었다. 알다시피 칼 안드레는 타일과 벽돌 같은 공업 재료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닥에 배치하는 작업으로 유명한데, 『미술 노동자』를 쓴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은 그가 재료를 바닥에 별 다른 기교 없이 (”수평적으로”) 늘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작업과 “산업 분야의 생산 공정 사이에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고 쓴다. 말하자면 벽돌공이 벽돌을 “들어 올리고, 내려놓고, 다시 들어올리고 또 내려놓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작업함으로써 그가 “스스로를 단 하나의 기술을 가진 노동자로 표현”하고 이를 통해 “노동 개념의 핵심을 수작업으로 축소”시키는 일종의 선언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미니멀리즘 예술이 미술사 내에서 그리고 미술 시장 내에서 대단히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가 된 것과는 별개로 그것의 내부에는 ‘고고한’ 예술을 ‘투박한’ 노동으로 전유하고자 한 의지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예술은 다른 무엇도 아닌 노동이다.
이런 지점에서 보자면 방성욱의 ‘도미노 쌓기’와 칼 안드레의 ‘벽돌 놓기’는 (둘 다 사각형의 공산품을 작업의 재료이자 내용으로 삼는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술 작품이라는 특수한 미적 대상이 기실 예술 바깥(이를테면 공장)에서 온 재료들을 전시장 안에 배치하는 예술가의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 그런데 칼 안드레가 왜 더 이상 육체 노동에 종사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육체 노동자와 동일시하고 ‘예술 노동자’로 정체화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앞서 언급한 줄리아 브라이언 윌슨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1960년대 미국 “‘엘리트’ 미술계와 그 제도적 공간 안에서 미술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몇년간 투쟁을 벌였던 미술인들의 담론”이라는 당대적 조건을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아마도 이는 육체 노동자이자 예술가로서 자신이 속한 두 세계의 낙차를 고스란히 느끼고 그러므로 두 세계 모두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방성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동이 곧 놀이고 놀이가 곧 예술이라는 등식은 두 세계의 임시적인 화해를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작가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일테다. 그런 등식이 노동과 놀이와 예술 사이를 구획 짓는 경계에 의존하고 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서만 성립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이상으로 방성욱의 작업을 빌어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만 존재하지 않는) 예술이 과연 노동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을 되풀이하거나 혹은 노동을 놀이화해야 한다는 해방적인 구호마저 자기계발의 명령이 되어버린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가 내게 들려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어 대를 이은) 육체 노동자로서의 경험과 감정이었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예술가로서 작업을 하며 겪는 자기 분열은 기실 작업을 와해시키는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작업 전체를 지탱하고 견인하는 핵심이다. <노동의 놀이화: 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는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은 예술가이자 작업의 결과를 전시에 제공하는 노동자로서 그가 도미노 쌓기라는 작업의 내용을 ‘예술(art)’이자 ‘노동(labor)’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육체 노동자로서 노동할 때처럼 도미노 쌓기에 임하지만 예술에서는 그의 노동이 곧바로 가치 창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을 문제시하는 동시에 작가로서 그의 고유한 작업 논리(이를테면 도미노의 패턴과 같은)를 손수 작업에 남기는 일로서 도미노 쌓기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일(work)”이 된다. 문제는 만약 그것이 “사회적 가치에서 벗어나고 생산성이 없는” 무쓸모한 “놀이”이기도 하다면 왜 그가 타인에 의해 장난스럽게 도미노가 무너진 상황에서 “분개”했는가에 있다. 노동자로서,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예술 작품이자 노동의 결과에 강한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빚어지는 이유는 그가 제언한 것처럼 도미노 쌓기가 “인간의 가치 창출을 위한 창조적 노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증명해줄 물질적인 매개로 선택되었을 뿐인 도미노 쌓기라는 행위가 반복됨으로써 그와 기이한 상호 종속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미노 쌓기가 아무리 지루하고 무의미한 작업이라 한들 결국 그것을 하는 누군가에게는 전부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관계 말이다.
노동을 놀이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이를 노동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일견 “자기 학대적”이기까지 한 도미노 쌓기는 이런 지점에서 노동에 대한 그의 양가적인 감정을 언뜻 내비친다. 노동은 그를 소외시키지만 동시에 그를 이루는 전부이기도 하다. 그는 어쩌면 이런 노동자의 마음이 물리적인 형태로 전시장 한 공간을 점유하기를 원하기에 예술가로서 작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의 마조히즘적 쾌락에 대해 말하는 가속주의적 담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쩌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이런 소박한 진실은 아직까지 그의 작업에서 비교적 ‘큰’ 주제에 의해 가려져 있다. 그가 내게 말해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노동자로서의 불안은 관객들로 하여금 도미노를 쓰러 뜨리고 싶게끔 만드는 도미노 사이의 빈 공간 사이로 슬금 슬금 피어오를 뿐 작업의 주제로서 온전히 독립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내러티브는 기실 그가 노동과 놀이와 예술의 등식을 작업의 명제로서 채택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다. 2017년부터 노동 속에서 예술의 위상을, 예술 속에서 노동의 위상을 고민하는 작업을 해온 그의 다음 행보가 노동자로서의 경험과 감정을 시각적 언어와 논리로서 구현하는 작업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