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정동 - 방성욱에 대한 노트
곽영빈
미술비평가/ 예술매체학자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객원교수
방성욱의 작업을 처음 접하는 적지 않은 관객들은 종종 어떤 선택지를 부여받는다. 흥미로운 건 그것이 ‘감정적(emotional)’이라기보다는 그 말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감각적(aesthetic)’이라는 것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 ‘전-개인적(pre-individual)’이고, ‘기쁨’ 또는 ‘슬픔’처럼 명확하게 단위화된 감정의 경계를 범람하고 종종 누수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근래 유행하는 ‘정동(affect)’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기술은 그의 작업이 대개 ‘노동’과 ‘노동자’라는 선명한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요약되어왔다는 사실과 갖는 미묘한 간극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반복적으로 고백해왔듯이 기존의 묘사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지로 20살에 시작해 26살 가을 무렵까지 반도체 생산직으로 공장에서 일했던 그에게 “노동과 노동자”는 “자연스레” “작업에 큰 키워드”가 됐다. <Green Collar Workers>는 “20대 과반을 일했던” 이 시기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업인데, 일단 눈에 띄는 것은 ‘블루’도 ‘화이트’도 아닌 ‘그린 칼라 노동자’라는 방점이다. 작가는 자신의 전공인 사진과 영상을 통해 초록색 배경을 드러내는데, 이는 원래의 시공을 안 보이게 하거나 전혀 이질적인 환경과 장면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그린 스크린’을 떠올려주기도 한다. 즉 그것은 노동과 그 현장을 (비)가시화하는 것임과 동시에 번역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의 사진 작업은 대략 2만 5천에서 3만개에 달한다는 내연기관 자동차의 부품들을 해체해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는데, 이는 압도감과 지루함을 가로지르면서도 그 어디에 갖히지 않는 일련의 궤적을 촉발한다. 이는 우리가 ‘사실관계’를 인지적으로는 알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혹은 전혀 모른다는 양가적인 사실과 연동되는 효과다. ‘자동차’라는 깔끔한 개념과 도상으로 쉽게 요약할 수도 있었을, 이 자잘한 부품들을 우리가 일일이 다 봐야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가 10여분 길이로 편집한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작업은 장방형 스크린 프레임의 왼쪽에 작은 부품들을 확대해 보여주면서, 바닥에 앉아 이들을 일일이 흩어 나열하는 작가를 수직적인 부감 쇼트로 담는다. 종종 간과되지만 이 모든 과정은 공장의 환경을 시사하는 엄청난 기계 소음 속에서 이뤄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관객임과 동시에 ‘청중(audience)’으로 동시에 소환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 (오)작동하는 것은 ‘노동’과 ‘노동자’라는 인식과 감각 사이의 간극이다.
이후 작업인 <(주)Sunguk Room> 역시 한 대의 자동차를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전작의 연장선에 선다. 하지만 이는 현대자동차 하청 노동자로 일한 그의 장모님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작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확장의 시도이기도 했다. 자동차 생산의 역순으로 이뤄진 이 해체 과정에서 작가는 보다 메타적인 문제를 인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개인의 노동이 사회적 가치 안에서 평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지”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그는 이 문제를 “크기”나 “다수와 소수”라는 양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노동의 놀이화_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2023)가 그 결과물인데, 무려 9만 개의 도미노 조각으로 만든 이 작업은 “노동 대가의 크기, 제도의 진입 장벽 혹은 다수와 소수에 따라 신분, 계급을 정하고 사회적 가치 안에서 우위를 나눴던 불합리한 암묵적 합의”에 대한 그의 고민을 거의 그대로 가시화한 작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벽인데, 이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작가에게 보인 반응들은 곱씹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중 하나는 ‘불안감’(‘이러다 다 무너지면 어떻게 해요?)이고, 다른 하나는 ‘호기심’(‘이거 언제 무너뜨리실 거에요?’)인데, 흥미로운 건 양자가 공히 ‘허물어짐’에 기댄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이는 해당 레지던시와 전시가 끝나면 작업을 해체할 수 밖에 없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바탕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비가역적(irreversible)’인 산물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무너지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이는 거기에 들어간 시간과 이를 인간인 작가 자신이 수행했다는 사실의 ‘가치(value)’가 무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가치판단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업이 무너지고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자명했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게임(spiel/play)’이자 ‘놀이(spiel/play)’인 예술의 이 근본적인 속성이 전술한 ‘노동’의 가치와 내재적으로 충돌하는 것. 이것이 <노동의 놀이화_이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는 작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간 방성욱의 작업을 보면서 내내 떠올렸던 작가는 오민수다. 코로나 시기였던 2020년 매우 작은 공간에 그가 밀도 있게 설치한 일련의 기계장치와 사운드를 조우하자마자 매혹되었던 후자는, 플랫폼 배달 노동을 오랜 기간 병행하고 경험한 당사자로 노동과 노동자라는 문제를 꾸준하고도 다종다기하게 고민하고 변주해왔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접점을 공유한다. 물론 이러한 공통점은 둘 간의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보다 선명하게 전경화 해준다. 첫 개인전 <후진하는 새벽>(2019) 이후 <전기는 흐른다>(2020)와 <철의 피>(2021), <신기술: 흐름, 작동, 보통, 중립, 접지>(2022) 등을 거쳐 퍼포먼스 작업인 <킥스타트>(2024)로 이어진 촘촘한 궤적 속에서 오민수는 ‘노동(자)의 죽음’이라는 이중적인 문제를 일관되게 다뤄왔다. 내가 처음부터 주목했던 건 그가 이 문제를 이른바 ‘휴머니즘’이 아니라 내가 ‘인프라 휴머니즘(infra-humanism)’이라 규정한 차원에서 정교하게 재구성해왔다는 사실의 함의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많은 작업들이 굴복하고 마는, 노동자를 ‘희생자’로(만) 대상화하려는 유혹을 거의 금욕적으로 거부하면서, 그는 물류시스템과 AI 알고리즘을 아우르는 환경으로서의 인프라를 ‘(불)가능성의 조건’으로 정교하게 직조한다. 가령 2020년의 개인전 <전기는 흐른다>에 덧붙인 ‘작가노트’에서, 그는 “최근의 노동은 (치밀한 마케팅 전략에 따라) 첨단기술의 매끈한 (혹은 친근한) 껍질 뒤에 감춰진 채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확대하고 싶었다. 노동 현장 바깥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에 증폭기를 달아주고자 했다”고 썼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죽음이 전통적인 노동(자) 개념의 죽음, 또는 부재 속에서 반복된다는 명민한 인식, 즉 전자와 후자 사이의 메꿀 수 없는 간극에 대한 섬세한 감각의 결과다.
방성욱에게는 ‘죽음’이 전경화되지 않는다. 이는 부정적인 평가도, 비판도 아닌 기술(description)에 가깝다. 물론 그 또한 “노동이라는 키워드에 굉장히 부정적인 생각이 많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그의 부정적인 생각이 “기억 속 깊이 있는 노동의 경험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보다는 막막함, 불안함, 지루함 등등의 감정적인 것들로 남아있다”는 사실의 함의다. 그가 ‘노동자’ 출신 작가라는 사실에 대한 관습적인 환기는 그가 가시화하는 노동에 대한 기이한 물신화나 기계적인 승화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지지만, 작가는 자신이 “노동의 존엄과 가치를 의심한다”고 단언한다. 이는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도덕 안에서 윤리적이고 어쩌면 신성화된 노동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일해야 한다는 것을 가치보다 감정적 요소로 버티고 있는 개인의 가치”에 대한 그의 역설적인 환기는, 왜 “기억 속 깊이 있는 노동의 경험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보다는 막막함, 불안함, 지루함 등등의 감정적인 것들로 남아있”는지, 왜 그가 자신의 작업들에서 노동의 과정을 구성하는 자잘한, 끝없는 지속을 환기하는 요소들을 나열하고 집적하려 했는지 설명해준다.
이는 “노동보다는 근로라는 형태로 시대를 살아왔던 내 부모”에 대한 그의 환기를 단순히 ‘탈정치적인 것’으로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막막함, 불안함, 지루함”이란 ‘노동’이 아닌 ‘근로’라는 범주가 지속과 동시에 유예시켰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번 새들 & 해움 레지던시에서 선보인 전시인 《증상명이 필요합니다.》는 이전까지 ‘나열’하고 ‘집적’하려 경향과 단절하면서도, 위에서 환기한 정동과 감각을 보다 선명하게 감각화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마이너스 데시벨” 속에서 작동하는 무향실(anechoic chamber)은 <Green Collar Workers> 오디오비주얼 작업에서 전경화되었던 극심한 소음의 대척점에 서고, 어린 시절 ‘근로’로 녹초가 된 가족의 어깨를 주무르던 자신의 손가락이 “안마 대체재”로 여겨졌다는 회고는 몸에서 분리된 새하얀 손가락으로 물질화된다. 작업실 밖에 설치된 영상은 어린 시절 그라인더로 바늘을 갈던 어머니를 보며 작가가 느낀 “아찔함, 막막함”을 환기하면서도, 그것이 어쩔 수 없이 수반했던 “연민”과 “무력감”을 강조한다. 이들은 서두에서 환기했듯 노동과 노동자를 단순히 ‘소재’나 ‘주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정동’을 감각적으로 직조해온 작가로서 방성욱을 더욱 선명히 자리매김한다.
AI와 알고리즘의 급격한 도래를 통해 노동과 노동자의 위상과 성격이 새로운 위협에 처한 시대에, 그가 어떤 작업으로 대처할지 궁금한 것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